쓴맛의 추억 : 커피의 쓴맛
by 심 환
추억이라 조금 오래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거리마다 다방이 즐비하던 그때,
커피에 대한 첫 기억은 내 유년의 작은 범죄에서 시작되었다.
그 시절 대부분의 가정과 마찬가지로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으레 부엌에서는 달콤한 커피 향이 풍겼다. 지금 생각하면 좀 의아한 일이다. 동양인 한국에서 그것도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에 녹차처럼 동양의 차가 아닌 커피가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것이 말이다. 물론, 전쟁을 겪으면서 미군에 의해 여차저차 그런 상황이 되었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 이전 시대에서도 여기 한반도의 차(tea)는 고급문화였던 것도 커피가 대중화 되었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때 커피(병에 담긴 분말 커피) 가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추측컨대 요즘처럼 흔히 마시는 저렴한 음료는 아니었다. 분말 커피와 프리마(식물성 분말 크림)가 한 조를 이룬 커피는 손님접대용으로 각 가정에 구비되었던 듯하다.
아마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막 입학하던 때, 아니면 조금 더 어릴 때의 일이다.
이성보다는 본능이 지배력이 더 강한 나이였기에, 눈을 뜨고 있는 한 미친 듯이 동네를 뛰어다니고 달콤하거나 상큼한 어떤 것이 눈에 띄면 주저 없이 입으로 가져가던 시기였다. 나는 여느 아이들처럼 원초적 생존 에너지가 초 절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왕성한 에너지와 식탐만큼 호기심도 왕성했다.
그날도 어머니 친구 분들의 방문으로 집안은 시끌벅적했다. 나는 내 방에서 이제는 흥미가 떨어진 장난감들을 까만색 연필깎이 칼로 난도질하며 처벌하는 대 열중이었다. 부모님 방에서 들려오는 아줌마들의 오페라(수다)가 시작될 쯤, 부엌은 접시가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들과 향긋한 과일 향으로 가득 찼다. 전기포트에 물 끓는 소리가 보글보글 들렸고, 쪼르륵하며 물 따르는 소리가 한 아줌마의 아리아(웃음소리)에 맞춰 들려왔지만, 나는 여전히 광기에 휩싸여 장난감 학살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때, 티스푼이 커피 잔에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커피와 설탕과 프리마가 물에 녹으며 내뿜는 향이 과일 향과 뒤섞여 내 등 뒤에까지 풍겨왔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 달콤함과 상큼한 향에 내 입안은 금세 축축해졌다.
나는 땀나게 쥐고 있던 흉기들을 방바닥에 팽개치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쟁반 위 하얀 접시에는 정성껏 깎인 반달모양의 사과들이 예쁘게 담겨 있었고, 다섯 개의 꽃무늬 커피 잔이 하얀 수증기를 피어 올리며 옹기종기 놓여 있었다.
내 손은 의지와 상관없이 접시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마른 수건에 손을 닦으시던 어머니의 손이 초음속 제트기처럼 날아와 내 손등을 폭격해 추락시켰다. 아들을 사랑한 어머니는 깎지도 않은 빨간 사과를 하나 쥐어주셨지만, 나는 아름다운 사과접시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쟁반을 들고 잽싸게 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리아의 절정을 노래하던 아주머니와 조연 아주머니들의 ‘어머! 어머!’하는 탄성을 뒤로하고,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
나는 빨간 사과 하나를 두 손으로 잡은 채 부엌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묘한 향에 취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향기!
사탕처럼 달콤하고 땅콩버터처럼 고소하면서 초콜릿처럼 쌉싸름한, 손님들이 오면 집안을 가득 채웠던 그 향! 그런데 그 향은 사탕이나 초콜릿처럼 나를 흥분시키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것은 마치, 추운 겨울 창문을 열고 청소할 때, 따듯한 아랫목으로 도망쳐 이불을 뒤집어쓰고 청소가 끝나기를 기다릴 때처럼 묘한 아늑함이 느껴지는 향이었다. 이 설명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그렇다.
나는 쥐고 있던 사과를 선반 위에 내팽개치고, 나를 피해 서둘러 방으로 달아난 뒤에 남겨진 어머니의 부주의의 흔적으로 관심을 돌렸다.
빨간색 플라스틱 뚜껑이 까만 가루가 반쯤 차 있는 유리병 옆에 놓여 있었고, 눈처럼 하얀 가루가 담긴 그보다 작은 유리병 두 개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가루 중 하나는 불투명하게 반짝이는 설탕이고, 나머지 하나는 분유처럼 포슬포슬해 보이는 프리마였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했다. 그때만 해도 만만치 않은 가격 때문일 수도,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카페인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이 마시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곤 했다. 술이야 명절 때 음복이라는 기회로 접할 수 있었지만 커피는 그런 기회가 절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부엌 찬장 높은 곳에 보관했고, ‘쓴’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음식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내 관심 밖에 있었다.
먼저 두 개의 하얀 병 중 프리마가 든 병의 뚜껑을 열고 수저로 듬뿍 떠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 분유처럼 고소하면서 아득해지는 맛은 아니지만 그 비스무리한 맛이 입 안에 가득 느껴졌고, 오물오물 고인 침과 반죽해 녹여 먹는 프리마는 약간의 후회를 불러일으켰다. 혹시나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잊게 할 만큼 매력적인 맛은 아니었다. 친절하게도 나는 프리마 병의 뚜껑을 닫고, 물 한 컵을 마신 후에야 느끼하고 끈적하게 입안에 남았던 프리마를 깨끗하게 씻어 넘길 수 있었다.
나는 후회와 함께 완전범죄를 위해 죄수들이 기다리고 있는 처형장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때, 까만색 가루가 든 병과 빨간 뚜껑이 나를 유혹했다. 병 속의 짙은 암갈색 가루와 옆에 놓인 짙은 빨간색 플라스틱 뚜껑의 대비는 너무도 강렬했다.
어느새 내 코는 열린 병 입구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알싸하면서도 고소하고 쌉싸름한 향 뒤에 꿀처럼 달콤한 향이 뒤따르는 듯하다가, 풋 자두의 새콤한 향이... 뭐라고 표현 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향이 코를 간질였다. 나는 뒤돌아 어머니의 방문 쪽을 확인하고 반짝 빛나는 밥수저를 들고, 프리마 때보다는 좀 더 신중하게 반 스푼 정도를 떠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뒤 상황이야 여러분들의 짐작 대로다.
그리고, 순식간에 세월이 흘렀다.
어릴 적 혹독한 커피 신고식을 치룬 후, 그 쓴맛은 기억에서 잊혔다가 자판기 커피와 커피 믹스와 함께 되살아났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 쓴맛 나는 씨앗에 중독되어 버렸다. 술의 쓴맛 보다 나는 커피의 쓴맛이 좋다. 적어도 지금 내게 커피의 쓴맛은 ‘좋은 쓴맛’이다.
쓴맛은 혀의 뿌리 쪽 중앙부에서 느껴진다고 배웠지만 그것은 잘못된 상식이라는 것을 근래 알았다. 최근에 밝혀진 미각의 메커니즘에서는 맛 봉우리가 있는 혀의 모든 지점에서 맛을 감지한다고 말한다. 또한 단맛, 신맛, 짠맛, 쓴맛과 함께 감칠맛이 추가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4가지 기본 맛이 5가지로 늘어났다.
쓴맛은 다른 맛들에 비해 서서히 느껴지며 또한 오래 남는 특징 때문에 환영받지 못하는 맛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쓴맛이 나는 술과 커피를 즐기는 것일까?
술은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니니 뒤로하고, 커피의 쓴맛에 대해 짧게 말해보고자 한다.
커피의 쓴맛은 주로 카페인(caffeine)이라는 성분에 의해 느껴진다. 카페인은 알카로이드 (alkaloid)의 일종으로 커피 열매의 씨앗, 찻잎, 코코아와 콜라 열매, 마테차와 구아바 열매등의 식물에 많이 함유되어 있다.
카페인은 1820년 커피에서 발견되었고, 1827년 찻잎에 발견된 테인(theine)과 동일한 물질임이 밝혀졌다. 카페인이라는 말은 커피에 함유된 혼합물이라는 의미의 kaffein에서 영어로 caffeine이라 불리게 되었다.
카페인은 대략 석기시대부터 인간들이 섭취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채집과 수렵 생활을 하던 인류가 식물의 씨앗, 나무껍질, 잎 등을 씹어 먹다가 피로를 가시게 하고 정신을 각성시켜 활력이 돋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해진다.
식물에 있어서 카페인은 해충을 막는 살충제 역할을 하는 물질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 약리작용이 잘 알려져 있듯이 필수불가결한 성분임에 분명하다. 과해서 좋은 것은 세상은 없듯이 말이다.
차와 마찬가지로 커피 또한 기록에 따른 기원을 보면 인간의 정신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동양에서는 차가, 서양에서는 커피가 인류의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커피가 종교에서 철학으로 그리고 예술로 이어지는 정신작용에 큰 에너지가 되었고, 그 약리작용 이외에도 커피를 통한 교류의 장이 마련됨으로써 문화 발전의 큰 역할을 담당했음을 우린 잘 알고 있다.
이렇듯 커피는 단순히 기호 식품을 넘어 인류 문명의 정신적 발전에 꼭 필요한 에너지인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커피의 쓴맛은 매우 적당한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쓴맛은 bitterness이다.
쓰다는 bitter인데 그 어원은 고대 게르만어인 bitan에서 나왔으며, 그 뜻은 갈라진 틈이다. 이것이 변형되어 bite가 되었다. 그래서 bite의 원래 뜻은 쪼개는 것, 갈라진 틈이다. ‘잘라서 날카롭게 만들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자르다 ‘끝장내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것이 음식문화와 만나 쓴맛인 bitter로 되었다. 쓴맛이 다른 맛에 비해 감수성이 높고 불쾌하기 때문에 감각을 날카롭게 자극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날카로운 자극은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데, 그 것은 독과 관련이 있다.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할 때, 인간은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야 했고,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의 구분은 ‘독이 되는지 아닌지’였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독은 쓰다는 경험적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하나의 본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즉 쓰면 뱉으라는 하나의 본능적 자기 방어기구의 작동 이벤트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서 쓴맛에 무뎌지기 시작했는데, 관련된 연구들에 의하면 이것은 쓰지만 이로운 것과 이롭지 않은 것을 분간하게 된 인간의 학습능력에 의해 생겨난 결과라고 한다. 먹지 않아도 독을 분간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쓴맛에 관대해 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쓴맛은 문화가 본능을 정복한 중요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쓴맛은 여전히 좋은 맛이라기보다는 조금은 인내해야하는 불쾌한 맛임이 분명하다. 그 인내의 뒤에는 쓴맛 물질의 약리작용에 의한 육체적 정신적 이로움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이러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 설탕이나 우유 등을 첨가해 쓴맛을 뒤로 감추며 즐기기도 한다. 우리가 쓴맛을 즐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쓴맛이 느껴짐으로써 다른 맛들이 부각이 되고 조화롭게 되기 때문이다. 커피나, 맥주, 초콜릿의 쓴맛을 감내하며 즐기는 것은 그 쓴맛을 느끼는 동시에 숨어 있던 다른 맛들을 풍부하게 느낄 수 있는 매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유년의 쓰디쓴 커피에 대한 추억은 달콤하거나 상큼한 맛 보다 오래 남아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비록 그때는 괴로웠지만 입을 물로 헹궈도 맴맴 돌며 가시지 않던 쓴맛 뒤에 퐁당퐁당 튀어나왔던 맛들 때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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